핵전쟁이 발발할지 모른다는 보도가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 한반도 역시 핵군비경쟁 구도로 접어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국제사회는 어째서 무력분쟁 예방에 계속해서 실패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걸까요?
더 나은 삶의 터전을 만드는 일은 모든 시민들 공동의 과제인데요.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고민하시는 구독자님과 함께 읽고 싶은 더슬래시의 글 세 편을 소개드립니다.
푸틴, 바이든 그리고 진격의 윤석열 / 문아영
국제사회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막을 수 없었는가? 아니면 막지 않았는가? 나토 가입을 희망하던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공을 받는 지금, 미국과 나토는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바이든은 대체 무엇을 위해서 러시아의 침공 예언을 그리도 성실하게 했던가? 내부 정치를 위해 전쟁을 동원하는 것은 과연 푸틴뿐일까?
베게티우스의 낡은 격언에 기대어 선제타격의 꿈을 꾸는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百戰百勝은 非善之善者也요. 不戰而屈人之兵이 善之善者也라.” 손자병법에 담긴 지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했던 손무의 말이다. 누군가는 이것을 아무도 넘볼 수 없을 만큼의 막강한 국방력을 갖추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앞서 경고했던 가장 쉬운 해석의 전형이다. 하지만 그런 해석뿐이었다면 손무는 굳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손무가 말한 최선의 조건은 명료하다. 최선은 ‘싸우지 않는 것’에서 가능해진다. 싸우는 순간 그것은 최선이 아닌 것이다.
한국전쟁의 종전선언은 현재의 교착상태를 반전하고 신뢰를 구축하는 동시에 비핵화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마중물로서의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는 비단 남북관계의 개선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나아가 세계의 안보딜레마를 흔들어놓을 계기가 될 수 있다.
한반도의 종전 그리고 평화체제는 비핵화, 평화협정, 군비통제, 적대적인 관계의 개선과 신뢰구축과 모두 연결되어 있다. 선후의 관계가 아닌 모두가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평화와 보편적 인권의 가치가 내재화될 때 가능할 수 있다. 그렇다면 종전과 평화를 위해서는 시민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한반도의 정전협상은 즉각적인 전쟁중단, 즉 정화 없이 이루어졌다. 정전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새로운 국경선을 만들기 위한 전쟁은 계속되었다. 비무장지대를 만들고 정전을 관리하는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독위원회가 활동하는 ‘k-정전’의 모형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수출되어야 하는 비애를 느끼면서도, 핵전쟁까지도 갈 수 있는 현 전쟁의 비극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평화운동의 시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k-정전’의 경험이 현재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정전협상이든 평화협상이든, 정화가 선행되지 않는 협상은 전쟁의 비극을 심화시킬 수밖에 없음을 지구시민에게 알리는 작업이 평화운동의 의무여야 한다는 것이다. 정화가 없는 정전협상은, 영화 ‘고지전’의 반복이다. 만국의 시민에게 정의롭지는 않은 평화인 정화와 정전이, 우크라이나 땅에서 벌어지는 인도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차악책이지만 불가피하게 가야할 길임을 말해야 하는 평화운동의 한 기로에 우리는 다시 서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